
닫힌 문, 몇 시간 만에 열린 문
2026년 2월 20일 금요일, 워싱턴의 연방대법원.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6 대 3 판결문에서 비상경제권한법에는 관세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고 적었다. 1년 가까이 세계 무역을 흔든 관세의 법적 근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법원이 경제나 외교에 특별한 식견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재무부가 지난해 12월까지 이 관세로 거둔 돈은 1,330억 달러가 넘었고, 판결 뒤 환급을 요구하는 수입업체 소송이 1,000건을 넘었다.
그런데 같은 날 백악관은 1974년 무역법 122조를 꺼내 전 세계 수입품에 10%의 관세를 매기겠다고 발표했다. 한 번도 쓰인 적 없고 150일로 시한이 묶인 조항이었다. 트럼프는 판결을 터무니없고 반미적이라고 비난했고, 이튿날 그 숫자는 15%가 되었다. 소수 의견을 낸 캐버노 대법관이 지적한 대로, 대통령에게 관세를 허락하는 다른 법은 여럿이었다. 트럼프는 국가안보와 불공정 무역을 근거로 한 관세를 이어가겠다고 예고했고, 5월에는 국제무역법원이 122조 관세에도 제동을 걸었다.
법이 문 하나를 닫자 몇 시간 만에 다른 문이 열린 셈이다. 이 장면은 트럼프주의가 어떤 힘인지를 압축해 보여 준다. 제도가 막아서도 방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러스트벨트에서 시작된 물결
트럼프주의는 단순한 공화당 보수주의가 아니다. 관세와 보호무역, 강경한 이민 통제, 다자 기구보다 자국 이익을 앞세우는 외교, 기성 정치와 주류 언론을 향한 반감, 기독교적 정체성과 총기 소유권을 강조하는 문화적 보수주의가 한 몸을 이룬다. 마가(MAGA)가 트럼프 개인의 카리스마에 기대는 지지 운동이라면, 트럼프주의는 그보다 넓은 정책과 정서의 흐름에 가깝다.
그 뿌리는 트럼프 개인의 인기보다 깊다. 제조업 쇠퇴로 일자리를 잃은 러스트벨트, 벌어지는 소득 격차, 이민과 문화 변화에 대한 불안,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그 토양이다. 지지자들은 이를 노동자와 주권을 지키는 현실적 교정으로 본다. 비판자들은 보호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 제도에 대한 공격으로 본다. 어느 쪽이든 이 노선은 트럼프 개인의 정치적 운명과 별개로 공화당의 주류를 바꿔 놓았다. 그리고 미국의 무역과 이민, 동맹 정책을 통해 바다 건너 나라들의 살림에까지 닿았다.
계약서가 된 동맹
이 노선은 2025년 이후 세계 질서의 문법을 바꿨다. 미국은 세계보건기구에서 빠져나와 2026년 1월 탈퇴를 마무리했고, 파리기후협정에서도 다시 걸어 나왔다. 1월 7일에는 유엔기후변화협약을 포함한 66개 국제기구와 협의체에 대한 지원을 끊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유엔인구기금과 국제대테러포럼도 그 목록에 들었다. 국무부는 이들 기구가 낭비적이고 미국 주권을 위협한다고 설명했다. 국제위기그룹의 다니엘 포티는 이를 내 방식이 싫으면 떠나라는 태도라고 평했다. 지나 매카시 전 백악관 기후보좌관은 미국이 기후변화협약 밖에 선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고 꼬집었고, 스탠퍼드대의 롭 잭슨은 다른 나라들이 기후 약속을 미룰 핑계가 생겼다고 우려했다.
동맹은 거래의 언어로 다시 쓰였다. 대한민국은 2025년 7월 15% 관세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에 합의했다. 대만은 850억 달러어치의 미국산 에너지와 항공기를 사는 대가로 관세를 20%에서 15%로 낮췄다. 영국은 대부분의 상품에 10% 관세를 받아들였다. 독일의 메르츠 총리는 유럽의 공동 입장을 먼저 모으겠다고 했다.
퓨리서치센터가 올해 36개국을 조사한 결과, 미국에 호감을 보인 비율의 중앙값은 37%, 트럼프의 국제 지도력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23%였다. 비교가 가능한 24개국 가운데 16개국에서 트럼프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고, 오른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호감도가 오른 곳은 29%에서 40%로 반등한 멕시코뿐이었다. 미국이 세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는 응답의 중앙값은 35%, 다른 나라의 이익을 고려한다는 응답은 32%였다.
나라별로 보면 차이가 더 선명하다. 2022년 캐나다인의 83%가 미국을 믿을 만한 파트너라고 했지만 올해는 35%였다. 한국에서도 미국 호감도가 1년 새 두 자릿수로 떨어졌고, 관세 정책을 지지한 비율은 14%에 그쳤다. 튀르키예와 이탈리아, 인도네시아에서도 호감도가 두 자릿수로 빠졌다. 반면 이스라엘에서는 81%가 미국에 호감을 보였고, 73%가 트럼프의 이란 정책을 지지했다. 조사 대상국 가운데 뚜렷한 과반이 지지한 유일한 나라였다. 같은 노선이 어떤 나라에는 방패로, 어떤 나라에는 청구서로 다가온 것이다.
'미국 우선'이 도착한 곳, 중동
가장 큰 역설은 중동에서 드러났다. 트럼프주의는 해외 개입을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을 공습했고, 전쟁은 여덟 달을 넘겼다. 호르무즈가 막히자 미국의 휘발유 값은 갤런당 4달러를 넘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스물네 살 대학원생 앤디 소마는 중동 분쟁에 끼어들지 않겠다던 약속이 깨졌다며 생애 처음으로 꼭 투표해야 한다고 느꼈다.
11월 3일 공화당은 상·하원을 모두 잃었다. 선거 당일 트럼프는 이스라엘에 주던 연 40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끊고 무기 판매로 돌리겠다고 말했다. 네타냐후도 원조를 10년에 걸쳐 줄이고 싶다고 말해 온 터였다. 가장 가까운 동맹에게도 거래의 셈법이 적용된 것이다.
선거 다음 날 밴스 부통령은 패배의 원인을 전쟁으로 짚었다. 그러면서도 유권자의 요구로 전쟁 종식과 생활비, 이스라엘과의 관계 변화와 나란히 미국 우선을 다시 꼽았다. 대학 공화당 단체는 1974년 이후 최악의 패배라며 행정부와 당을 탓했다. 트럼프를 강한 지도자로 보는 30세 미만 유권자는 2024년 약 절반에서 4분의 1로 줄었다.
패배 직후 트럼프가 앉힌 공화당 전국 위원회 위원장에게는 깜짝 도전장이 날아들었고, 트럼프는 그의 유임을 공개 지지했다. 트럼프 개인의 장악력에는 금이 갔지만, 트럼프주의의 언어는 여전히 당의 중심에 남아 있다. '트럼프 없는 트럼프주의'가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로 거론되는 이유다.
문지방 위의 세계
그렇다면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관세의 법적 근거는 법원에서 흔들렸지만 관세라는 도구는 다른 법으로 옮겨 갔다. 동맹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값을 매기는 계약서가 되었다. 미국이 비운 국제기구의 자리를 누가 채울지는 아직 열려 있다. 트럼프 이후의 공화당이 관세와 이민, 자국 우선을 완전히 버릴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흐름은 한 사람의 임기를 넘어설 것이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은 관세와 방위비, 공급망이라는 세 장의 청구서를 앞으로도 마주할 것이다. 워싱턴의 정권이 바뀌어도 그 청구서의 양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